[TV읽기]"여배우는 나이 들면 반드시 제 몫을 한다"
[조선일보] 2004년 01월 12일 (월) 18:10  

황신혜·고두심·배종옥…탄탄한 연기 돋보여
[조선일보] 요즘 TV가 우열반을 편성한 것은 아닐까?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시청자로서 수요일과 목요일은 어떤 드라마를 볼까 고민할 정도이다.

당장 안 봐도 인터넷이란 ‘대안’이 있다는 점이 기쁘다. 각기 개성을 지닌 맞수끼리 맞붙은 편성이 모처럼 먹을 만한 것만 차려놓은 뷔페에 간 기분이다.

우선 SBS ‘천국의 계단’. 대장금에 이어 시청률 2위인 이 드라마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권상우와 최지우의 매력이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는다.

“이효리가 노래를 못 부른다”는 말을 해봤자 세상이 관심을 보이지 않듯 이 두 주인공의 ‘발음 장애’를 문제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동변상련의 애틋함인지 이 두 연인은 정말 잘 어울린다.

권상우가 “사랑해” 하고 단 한 문장을 말하며 반지를 끼워줄 때, 최지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눈물을 쏟기 직전의 얼굴로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네티즌조차 자막을 넣어달라고 할 정도지만 이들은 ‘발음의 벽’을 넘어 TV 스타의 자리를 굳혔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이 아름다운 두 남녀 배우의 연기는 TV의 솜사탕 같다.




그리고 MBC ‘천생연분’에는 황신혜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천생연분’의 황신혜를 가리켜 “여배우는 나이 들면 반드시 제 몫을 한다”고 했던 친한 후배의 표현이 정확하다. 2002년 황신혜가 MBC ‘위기의 남자’에 아이는 셋이나 달리고 바람난 남편을 둔 주부로 나온다고 했을 때 그 어여쁜 황신혜에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생각했다.

그러나 황신혜는 강인함과 갈등을 잘 버무린 주부를 연기해 ‘예쁜 여자일수록 박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천생연분’에서도 황신혜는 언제나 그랬듯 시청자의 기대를 웃돈다. “누나, 고스톱 치자”는 안재욱과 권오중에게 “고스톱?!” 하며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달려갈 때, 은근한 표정으로 안재욱을 흘낏 훔쳐볼 때, 황신혜는 사랑스럽다. 여배우가 나이 들어서 더욱 더 매력적이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TV 시청자의 기쁨이다.

KBS ‘꽃보다 아름다워’야말로 모범생이다. 예습 복습 착실한 모범생들이 만든 탄탄한 드라마다. 무엇보다 고두심과 배종옥의 모습은 감탄스럽다. 고두심은 애틋한, 손해 보는, 그러나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어머니를 연기한다. 어렵고 힘겨운 작업인데 이 여배우는 수월하게 해낸다. 그 내공이 감탄스럽다. 배종옥도 그렇다. 깜찍한 이미지의 30대의 그녀가 이제 곰삭은 젓갈처럼 맛깔스럽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연기자라는 집단’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허물게 된다.

한고은도 주목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매력이 철철 넘치는 20대의 여성은 마치 제대로 손을 보지 않은 원석과 같다. 황신혜나 배종옥이 그러했듯이 꾸준히 인생과 만나고 배우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긴다면 ‘큰 물고기’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

TV는 아무리 그 크기가 커진다 해도 ‘집안 가구’의 팔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형 스크린이 아니라 자그마한 TV 화면에서 일하는 배우들, 특히 여배우는 파르르 떠는 눈썹 연기, 얼굴에 붉은기가 스쳐가는 숨겨진 놀라움까지 승부해야 한다. 세월과 더불어 TV라는 조그만 상자 속에서 빛을 발하는 여배우들 때문에 때로는 TV가 ‘보석상자’가 되기도 한다.

(전여옥 /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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